2016년 1월 1일 · 에세이(Null)

큰따옴표

너는 무슨 맛이니? 나는 죽을 맛이야.

큰따옴표

(TEST)

민생 소비 쿠폰

21대 대통령 대선 당시, 회사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누구를 뽑아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그래서 나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 노력하며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었다:

  • 집에 돈 많으면 김문수,
  • Ai발전을 생각한다면 이준석,
  • 노동자의 권리를 생각한다면 권영국,
  • 나라에서 돈 주는 거 받고 싶으면 이재명

아니나 다를까, 이재명은 당선되자마자 바로 돈을 뿌렸다. 민생 소비 쿠폰 15만원과 영화티켓할인권을 받아 들고 즉시 영화 “해피엔드”를 보러 갔다.

해피엔드

나는 해피엔드가 블레이드 러너 같은 SCI-FI 장르인 줄 알고 보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꿘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영화였다. 꿘의 세계에 발을 들인 주인공 ‘코우’와 DJ가 되어 그저 인생을 즐기고 싶은 ‘유타’의 성장과 충돌을 담은…. 스크린 속 장면마다 기억이 겹쳐 보여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첫 대자보

내가 처음 공적 공간에서 글을 썼던 건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로 나라가 술렁인 직후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인용 소식에도 이미 대자보 문화는 마른 갈대밭에 불씨처럼 번진 뒤였다. 그래서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대자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붙었다. 그 시기에 조형대학교 학생들은 “MT 전원참석”라는 공지를 받았다. 참석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는 결석 처리를 하겠다는 학과장의 으름장에 나는 화가 났다. 그 즉시 집으로 돌아가 <민주사회 역행하는 MT 강제참석을 규탄한다> 라는 제목의 글을 써내려갔다. 민주사회/규탄 같은 단어는 평소 쓰던 단어도 아니고, 그냥 주변에 붙은 대자보를 읽고 뭔가 있어보여서 따라 썼다.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

  • 1.MT 강제 참석 규탄
  • 2.학생의 학습권·자기결정권 침해
  • 3.교원의 수업권 침해
  • 4.강제 참석 지침 철회 및 대안 제시

학교주변 화방에 들러 가장 큰 사이즈의 종이를 구매했다. 평소 글씨체가 멋지다고 생각했던 선배를 찾아가 내가 쓴글을 보여주었다. 익명으로 글을 게시하고 싶은데, 내 글씨체를 사용하면 들통날거 같다는 정황을 들려주니, 많은 조형대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며 흔쾌히 본인의 손글씨로 종이를 가득 채워주었다.

전략은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볼수있도록 점심시간 직전에 조형대학교 정문 엘레베이터 앞에 붙이는 것이었다. 종이에 양면테이프를 미리 붙여놓았고, 벽에서 내 손이 떼어지기 무섭게 엘레베이터에서 쏟아져 나온 조형대학교 학생들은 눈앞에 붙은 거대한 종잇장 앞에 둘러모였고 난 눈을 흘기며 열심히 도망쳤다. 이것이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작성한 대자보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자보가 철거 당하고, 작성자를 색출하려는 과정에서 글씨를 대신 써준 선배가 오해를 받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나의 대자보를 지지해 주었고, 결국 학교에서 MT강제참석을 철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목소리를 내어서, 문제를 해결한 첫 경험이었다.

너는 무슨 맛이니? 나는 죽을 맛이야.

‘동성애자’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동네북 같은 존재였다. 종교단체에서는 내부적으로 공동체의식을 다지기 위해 ‘공동의 적’을 두는 수법을 사용했고, 대표로 ‘동성애 타파’를 내세웠다. 안타깝지만 성소수자의 존재유무조차 생소했던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 일상을 파고들었다. 학교 앞에서는 ‘동성애자의 양심고백’ 이라는 전단을 버젓이 나누어주었고, 번화가 길거리에는 ‘동성애=에이즈’라는 팻말을 든 단체가 서명운동을 했다. 포털 사이트들은 클릭 수를 노리고 혐오 기사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크고 작은 차별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던 가운데, 모두를 충격에 빠지게 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졌다:

  •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던 활동가들에게 문재인은 TV 토론장에서 “나중에”라며 책임을 유예했다.
  • 얼마 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무지개 깃발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려던 활동가들이 체포/연행됐다.

온라인 여론은 “폭력 시위니 당연한 결과”라며 활동가들을 탓했지만, 정작 폭력적이었던 것은 무지개 깃발에 투영된 혐오와 공권력의 과잉 대응이었다. 유력 대선 후보, 곧 국가최고통치권자가 될 사람이 보여 준 모습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포털 댓글창에 면죄부를 던져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성소수자 당사자들 사이에서 SNS에 커밍아웃 하는 글을, Ally 는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글을 게시하는 물결이 일기도 했다.

그런 시절, 나는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 당시 내가 마케팅 수업을 들으며 작업한 광고물과, 미술치료를 공부하며 그린 그림을 통해서 알아보자:

“너는 무슨 맛이니? 나는 죽을 맛이야.” 라는 카피가 당시 사회초년생들이 느끼는 공감대를 통해 신제품 홍보를 자연스럽게 이루었다 (당시 다양한 맛의 과일소주가 유행했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제일기획 출신’의 교수님에게 A를 받았다. 내가 봐도 웃기긴 하지만,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큰따옴표”

‘과학과 윤리’라는 수업이 있었다. 기말 시험으로 원하는 주제를 골라 강단에서 10분씩 발표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그 수업에는 굳이 원치 않게 커밍아웃을 하게 된 같은 과 선배 형이 있었다. 그 형은 강단에 오르더니 PPT를 띄우고 “에이즈는 원숭이에게서 왔다”느니 종교 단체에서 퍼뜨린 정보를 기말 과제로 읊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동성애자의 양심 고백”, 학교 정문 앞에서 나누어 주던 팸플릿도 자료로 들어가 있었다. 10분 내내 온갖 개소리를 가만히 들어줘야 했는데 정말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표 내용이 혐오에서 포용으로 바뀌면서, “동성애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고 5초 만에 논리를 비약하며 마무리되었다. 그 형은 “나는 Ally다”라는 금메달이라도 목에 건 듯,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강단에서 내려왔다. 교수를 포함한 많은 학생이 “민감한 주제”를 용기 있고 과감하게 다루었다며 큰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라떼는 정보를 얻고 싶으면 도서관과 박물관에 가는 게 국룰일 만큼, 좋은 정보를 구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하지만 학점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다수의 학생은 인터넷 네이버 지식인과 블로그를 인용했다. 요즘엔 AI 덕분에 단순한 ‘정보의 홍수’ 시대를 넘어서 ‘정보의 쓰레기장’으로 불리는 인터넷 공간이지만, 당시엔 모두들 크게 문제의식이 없었다. 정문에서 받은 팸플릿도 있겠다, 그 선배 형도 그리했을 것이다. 애초에 성소수자 가시화조차 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편견 없는 정보를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사실 그 수업에는 나를 포함해 3명의 성소수자가 있었다. 학교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친목 모임의 형태로 존재해, 친한 사람들끼리 함께 수강한 것이었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준 충격은 컸다. 우리는 퀴어 당사자들의 말이 조명받아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친목 모임을 졸업하고 학교 동아리로 정식 출범하기로 결정했다. 모임 이름도 바꾸기로 했다. 남성 동성애자 중심적인 이름에서(게이-게이-) 레즈비언/트랜스젠더/젠더퀴어 회원들을 대변할 수 있는 포용적인 이름을 원했다.

동아리의 목적이 “퀴어 당사자의 말을 조명하자”인 만큼, 하고 싶은 말을 어떤 것이든 두 개의 기호 사이에 자유롭게 담을 수 있다는 의미로 “큰따옴표”를 동아리명으로 정했다.

LGBTAIQ

교내에 여성학 강의가 신설된다는 소식에 큰따옴표 동아리 사람들과 단체로 수강하러 갔다. 교수님은 여성학이 단순히 ‘여성’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여성-장애인, 여성-성소수자 등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며, 정체성은 복합적으로 교차한다고 짚었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수강하는 대형 강의에서, 우리 동아리 회원들은 그동안 교내에서 느껴본 적 없는 포용감을 느꼈다.

LGBTAIQ라는 용어의 정의도 나는 여성학 수업에서 처음 접했다. 예전에는 ‘QIA’가 아니라 ‘AIQ’ 순서로 쓰였거나, Q가 한때 ‘Questioning’로 불렸다가 후에 ‘Queer’로 정립되는 등, 수시로 용어와 정의가 달라지는 해외 담론이 한국에 수입되는 과도기였다. 교수님은 각 알파벳이 의미하는 단어와 정의를 차례로 물었는데, LGBT 이후부터는 우리 동아리조차 답변이 줄어들었다.

A,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 무성애자‘라는 설명을 들었을때 나는, 사실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말로 옮기긴 어렵다. 단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임에도 “나다“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묘사일테다.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느꼈고, 행동했는지 설명이 되는 유일한 단어였다.

이후 ‘무성애’와 관련된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다. 여성학 시간에 배운 무성애의 개념과 맞아떨어지는 글들이 있는가 하면, 트라우마나 호르몬 결핍으로 생긴다고 설명하거나, 고쳐질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글들도 많았다. 그 외에는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전무했다. 돈 없는 대학생이었던 나는 시중에 국문으로 된 유일한 무성애자 서적을 손에 넣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신서 등록을 요청하고 수 주를 기다려야만 했다.

동아리의 규모가 성장함에 따라,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전하고 싶은 말들을 SNS 게시글, 홍보 포스터, 현수막 등에 담아내는 다양한 활동을 기획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정작 내 마음속에 있는 마음을 적어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해외 웹사이트에 적힌 글들을 읽으며 더 자세하게 알게 될수록, 나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설명이 없다는 찝찝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애자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표현해도 되는지, 허락받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동아리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성적 지향은 색상 스펙트럼과 같아. 세상에 70억 명이 있다면, 성적 지향의 종류도 70억 개일 거야.”라며 서로의 경험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다고 말해주었다. 그 이후에야 나는 비로소 동아리 사람들에게 “나 무성애자야” 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